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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한 칼럼] 한국 교계, “비워야 산다”

기사승인 2019.04.25  17: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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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우는' 말씀사역과 은사사역에 이어' 비우는' 마음사역(생명사역)을 해야 산다

[구요한 칼럼]

한국 교회, "비워야 산다."

-'채우는' 말씀사역과 은사사역에 
'비우는' 마음사역(생명사역)을 해야 산다-

 

   
<말씀사역>과 <은사사역>으로 ‘채워’ 온 한국 교회,
이제는 <생명사역>(마음훈련, 마음사역, 새마음훈련)을 통해 ‘비워야 산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교인 숫자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종교 선호도는 꼴찌다.

한국 교회는 선교 100여 년 만에 세계가 놀랄 만큼 경이로운 성장을 했지만 1990년 이래 성장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가 하락세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 통계청의 표본 조사에 의하면 1991년 개신교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18.6%였는데 1994년에는 18.2%로 0.4% 감소했다. 한편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개신교가 불교를 제치고 처음으로 종교인 숫자 1등으로 등극했다.(아래 표 참조).

   

▲2015년 통계청 종교인 수 및 종교별 신자 수 

그러나 개신교가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이유는, 이전까지는 통계 상으로는 다소 증감을 보이다가 2017년 통계부터는 각 교단 별로 일제히 하락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각종 자료를 취합하여 정리한 각 교단 교세 추이는 위와 같다. 위의 표를 보면 각 교단 별로 교세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위에 적시한 교단의 교인 수를 모두 더해 보니 약 1,200만 명이 된다. 이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군소교단들의 교인수도 만만치 않을 텐데 아무튼 위의 교단들의 교인 수 총계가 2015년 통계청 통계인 967만 5000명을 훌쩍 뛰어 넘고 있다. 개신교가 2015년 이래 감소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약 200만 명 이상이 허수라는 소리다.

더군다나, 개신교 인구가 2005년 정부 통계에 의해 870만 명일 때, 이중에 이단 교인 수가 약 150만~250만 명 정도 포함된 것으로 예측하여 개신교 인구를 620~720만 명 정도로 추정했다.[1] 이런 비율을 2015년 통계에 적용하면 실제 개신교 인구는 690 만~8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 주요 교단 교세 추이


양적 저하와 질적 저하

 

숫자가 줄어들면 질적으로는 성숙한가? 아니다. 한국 3대 종교 중에서 개신교는 불교, 천주교 다음으로 비신자의 종교에 대한 선호도가 꼴찌다.

최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인구수와 호감도가 정반대로 집계됐다.

개신교인 비율은 20.3%로 불교(19.6%)와 천주교(6.4%)를 제치고 종교 인구수 1위를 차지했지만, 호감도 1위 종교는 개신교가 아닌 불교로 나타났다. 비종교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호감도는 불교(40.6%), 천주교(37.6%), 개신교(9.5%) 순이었다. 불교가 개신교에 비해 4배나 더 높았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종교’와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종교’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셈이라고 불교계는 꼬집었다.[2]

불교는 170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토종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는 겨우 1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외래 종교(?)이지만,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기독교의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봉건제도 타파, 현대적 교육과 의료 혜택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급속히 퍼져갔다.

그 결과, 기독교인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이 많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당시, 대통령과 총리 대법원장 여당 원내대표가 장로였고, 야당 대표가 집사였으며, 4성 장군의 55%, 180개 대학 학·총장의 70%, 국회의원 35%가 크리스천이었다

개신교는 한국에서 사회 봉사나 구제도 제일 많이 한다. 한국의 구제 단체 반 이상이 개신교 관련 단체이다. 장애시설의 66%, 아동보호시설 72%, 노인복지시설의 46%가 기독교이며 10년간 3000억 원의 북한지원을 한국 교회가 감당했다.

 

-성공도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개신교의 종교 선호도는 꼴찌

개신교인이 이처럼 사회적으로 성공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종교 선호도는 왜 꼴찌인가? 많은 사람들은 개신교인의 영성이 낮고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불교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도 세상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비움과 절제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을 받았다는 크리스천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세상의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신앙의 목표로 삼고 온갖 악을 자행하고 있으니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시기하시고 근심하시는 것은 물론(약 4:4-5; 엡 4:30), 세상 사람들도 실망하여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사람은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 ‘세속화/물질주의’(44%)와 ‘목회자의 자질부족/사리사욕/이기심’(34%)을 꼽으면서, 한국 교회가 영성(세속화/물질주의 극복)과 도덕성(목회자의 사욕 포기)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영성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물질주의, 성공주의, 출세주의와 같은 이 세상적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영성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이 세상적인 물질, 명예, 권력, 성공 등에 집착하는 과오를 범했다. 교회와 목회자의 성공 척도를 교인 수, 건물 크기, 예산의 규모에 두었고, 교인에 대한 평가도 사회경제적 지위, 헌금 액수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영적 능력을 잃어버렸다.

한 조사 결과 ‘한국교회가 영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는 응답자는 15%에 머물고 있으며, ‘교회 지도자의 영적 자질이 우수하다’는 응답 비율도 19%에 불과하다. 비종교인 가운데 ‘종교 지도자의 자질이 우수하다’는 응답이 신부는 32%, 승려는 21%이지만, 목사의 경우에는 17%로 가장 낮았다.” [4]

다른 사람은 목회 자의 성 윤리 문제. 돈에 대한 탐욕의 문제, 교회 권력의 세습 문제 등을 한국 교회의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한다.[5]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도 2018년 7월17일 가진 “한국교회 위기와 미래라는 주제” 발표회를 가졌는데, 『국민일보』는 “목회자들의 도적적 실패가 한국교회 위기를 불러왔다”고 제목을 뽑았다.[6]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2017년 3월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지금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는 목회자들의 도덕적 실패가 자초한 위기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럼에도 “한국 교회를 위기로 빠트린 장본인들은 정작 위기의식을 갖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윤실의 한 강사는 “오히려 소수의 선한 목자들이 진정한 위기의식을 갖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들마저도 결국엔 한국 교회, 하나님 나라에 관심 쓰기보다 자신의 목회만 제대로 하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기윤실의 2017년 조사 결과 한국교회 목회자가 신뢰도 제고를 위해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서는 ‘윤리/도덕성’(49%)이라는 응답 비율이 압도적으로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는 ‘물질 추구 성향’(13%), ‘사회현실 이해’(11%), ‘교회 성장주의’(9%) 순이었다.

교인들의 신뢰도 제고를 위한 개선점으로 지적된 것은 ‘정직하지 못함’(28%), ‘남에 대한 배려 부족’(27%), ‘배타성’(23%), ‘사회에 대한 무관심’(9%), ‘기복주의’(8%) 순이었다.

결국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신의 결정적인 근거는 목회자나 교인들의 부도덕성 혹은 윤리성 부재 및 세상 것을 초월하는 영성 부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신교의 영적 무지, 영적 타락 및 영적 무기력

 

필자는 한국 개신교는 물론 전 세계의 개신교 문제를 3가지로 진단한다. 영적 무지, 영적 타락과 영적 무기력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영적으로 무지하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운동을 주도하셨다.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천주교의 무능과 부패를 지적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여 ‘선행과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깨우쳤다.

이후 종교개혁가들이 주도한 교회는 교리는 바르지만(?) 행함이 따르지 못하는 ‘죽은 정통’의 늪에 빠져 허덕이자 하나님은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 및 조나선 에드워즈를 통해 영적 부흥운동을 주도하셨다.

하나님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른하고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죽은 정통’의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D·L 무디의 부흥운동, 오순절성령운동, 은사운동을 통해 교회에 활력을 부어주셨지만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의 심각한 반대와 핍박, 새로운 운동 주도자들의 미숙과 담대함의 부족으로 한편으로 좌절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을 주도해 왔다.

은사운동도 그렇다. 은사사역이 말씀사역의 부족한 면을 보완해 주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개인의 신앙성장도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말씀사역을 통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은사사역을 통한 초자연적 체험과 기적행하는 능력, 그 다음 필자가 이 글에서 강조하는 생명사역, 즉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 초월 체험 및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 가고 있다.

그런데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에 젖은 많은 장로교회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을 대적하고 핍박한 바리새인들처럼, 아직도 말씀사역에만  안주하면서 은사사역을 핍박하거나 대적하여 영적 부흥의 불씨를 끄고 있고, 생명사역에 대해서는 이제 겨우 걸음마 수준으로 일부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수준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영적으로 타락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회심 이후 거룩한 삶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세상 것을 초월하는 영성을 높이거나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목회자는 교회 성장, 평신도는 성공과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는 교회 성장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훌륭한 교인’은 많이 양산했지만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서의 신자’를 양육하는 데는 실패했다. 목회자와 신자 모두 세상 것을 초월하는 영성 훈련과 거룩과 신앙 성숙 및 윤리도덕적 삶이라는 신앙의 본질 보다는 보이는 세상 것을 많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신앙의 목표 삼으니 타락과 방종과 교만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영적으로 무기력하다.

영권과 생명은 거룩을 통한 생명에서 온다. 그런데 과연 개신교에 거룩과 생명이 있는가? 교리 바르고(?) 성실과 인내는 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계 2:1-7),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행위는 없는 사데교회(계 3;16), 화려한 건물, 많은 교인, 풍부한 예산은 가졌지만 미지근한 신앙인, 보이는 것은 많이 가졌지만 영적 소경이자 영적 가난뱅이인 라오디게아교회(계 3;13-22)와 같은 ‘죽은 정통’의 교회가 바로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한 교회들이 아닌가?

이런 죽은 정통의 교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교회에서는 교인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비신자 속에 섞여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개신교의 희망

 

개신교에 희망은 없는가? 있다. 미래와 희망을 말하기 전에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이다.

현대의 문제는 종교에 실망한 비종교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개신교에서 이탈한 인구가 제일 많다. 종교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한국에서 무종교자가 된 경우, 개신교를 떠난 인구가 68%, 불교는 22%, 가톨릭은 10% 순이다. 타종교로 개종한 경우 개신교 52%, 불교 33%, 가톨릭 10% 순이다. 숫자로 보면 개신교에서 이탈한 숫자가 730만 명, 불교에서 270만 명, 천주교에서 115만 명 순이다.[7]

2017년 통계의 의하면, 기존의 교회에 실망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교회 ‘안 나가’를 거꾸로 읽은 것) 신자도 약 19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8] 이는 2010년의 100만 명 보다 90만 명이 늘어난 숫자다. 이들이 가나안 성도가 된 주된 이유는 교인들 간의 시기로 인한 상처, 교회의 과도한 봉사 요구, 목회자 비리나 교회분쟁, 교회의 배타적 분위기라고 한다.

한국 교회는 무종교에 잃어버린 사람들과 가나안 성도들만 제대로 흡수해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그들 중에 개신교에 대한 미련과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기윤실의 2017년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는 ‘사회 봉사에 적극적인 종교’ 1위, ‘10년 후 가장 증가될 종교’ 1위로 인정 받고 있다.

필자는 개신교의 문제 속에 바로 해답이 있다고 본다. 개신교가 불교와 천주교에 이어 선호도가 꼴찌인 이유는 개신교인들이 영적으로 수준이 낮고, 세상 것에 탐욕스럽고, 윤리 도덕에 무감각하고, 사소한 일로 패거리를 지어 잘 싸우고, 교인 동요나 이탈이 있으면 서슴 없이 이단이나 사이비로 잘 정죄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만 제대로 해결하면 개신교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은 이미 성경 속에 준비해 놓으셨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자 삶의 모범이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가장 잘 본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신유, 축사, 기적-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4:23).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가장 잘 본 받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첫째, 바울은 전파하고 가르치는 삶을 살았다.

전통적 교회는 교사 바울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중시한다.
 

둘째, 바울은 은사 사역자였다.

바울은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말씀 선포와 가르침에 더하여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도 살렸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한다.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8-19).

 

셋째, 사도 바울은 영성가[9]였다.

필자는 영성훈련을 하기 전까지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자 바울, 현장 사역에서 배운 은사사역자 바울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다가 필자가 영성사역을 하면서 바울이야 말로 예수님 다음으로 뛰어난 영성가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세상의 스펙이나 자랑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3:8-9).

- 바울은 남은 구원하고 자신을 버림을 받을까 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했다. 필자는 여기서 ‘버림 받는다’는 말은 상급이 아니라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해석한다(고전 9:27).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할 정도로 환경을 초월한 사람이다(빌 4:4).

-바울은 빈부에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이다(빌 4:11-12).

-바울은 자신의 잘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자랑했다(고후 12:9-10)

-바울은 신앙의 말년에 갈수록 더욱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소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산 사람이다(빌 1:15-16).

-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이방 사도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행 20:24).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다메섹 체험은 물론 삼층천에 올라가는 신비체험도 한 사람이다(고후 12:1-5).

 

이 정도만 해도 바울의 영성이 얼마나 높고 깊은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 개신교는 바울의 이런 점에는 관심이 없고 바울 신학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바울 서신서는 교리 부분과 실천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반부인 교리 부분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고(being) 이렇게 사역하셨다(doing)’이다. “그러므로”로 연결되는 후반부 실천 부분은 ‘그러므로 신자는 그렇게 되고(becoming) 그렇게 하라(doing’이다. 전자를 ‘하나님에 대한 서술’(divine indicative), 후자를 ‘사람에 대한 명령’(human imperative)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통 신학은 전자에 대해서는 엄청난 연구를 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별 언급조차 잘 하지 않는다. 요즈음에도 일부에서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냐 그냥 순종이냐, 행위언약이냐 은혜 언약이냐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둘 다 맞을 수 있다. 설령 한쪽이 틀린다고 해도 신앙생활에 별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한국 교회가 종교 선호도가 꼴찌인 이유는 교리 부분은 쓸데 없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연구하여 불필요한 분열을 조장하면서도 실천 부분은 지나치게 소홀히 하여 영적 수준도 낮고 윤리도덕의식도 낮기 때문이다.

 

교회사의 영성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바울의 실천적 영성을 심도 있게 추구한 사람들이 많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바울의 삼층천 체험을 사모하는 영성가들-귀용 부인, 아빌라의 테레사, 끌레보의 버나드 등-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영적 결혼’(spiritual marriage) 즉 기쁨체험, 황홀체험을 추구했다. 요즈음 말하는 임재기도나 관상기도를 말한다.

 

-관상기도를 통해 기쁨과 황홀 체험을 즐긴 칼뱅주의 청교도들

재미 있는 사실은 종교개혁가들이 비판한 관상기도를 칼뱅주의 청교도들이 즐겼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청교도라고 하면 율법적이고 엄격하며 말씀중심의 삶을 산 칼뱅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청교도들 중에서는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신비체험을 추구한 사람들도 많았다.

하워드 라이스는 『개혁주의 영성』에서 윌리암 보즈만을 인용하면서 두 종류의 칼뱅주의자에 대해 말한다.[10]  한 종류는 중세의 스콜라주의 전통을 지지하는 원칙주의자로서의 칼뱅이다. 이렇게 칼뱅을 이해한 경우 기독교는 정체적인 정통으로 흐르기 쉬우며 기독교 신자는 어떤 특별한 지위를 물러 받은 사람이다.

이러한 칼뱅주의자들은 기도와 신자들의 삶에 대해 말은 많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두려움과 외경심 이외의 신비 체험은 인정하지 않았다

칼뱅의 다른 한 면을 강조한 사람들은 인생의 역설을 칭송하고 모호성을 이성화 하기를 거부했으며 믿음의 마음으로 신비(체험)를 받아 들였다. 그들은 바른 교리보다는 믿음의 질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불변성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비주의를 허용했다. 그들은 차이점을 인정했으며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으로 지향해 왔다. 이러한 칼뱅주의자들은 그들의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사용해 왔다.

지금까지 첫째 유형의 칼뱅주의가 너무나 우세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개혁전통은 종교적인 체험에 관심이 없거나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칼뱅의 두 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에 들어 미국 휘튼 대학의 탐 쉬안다 교수는 통념과는 달리 유명한 청교도들이 관상기도를 즐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11]

미국 고든-콘월 신학교의 역사신학 교수인 리차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청교도인들은 모든 크리스천이 신비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가정했다”고 말한다.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J. I 패커(J.I. Packer) 박사는 쉬안다 박사 저서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쉬완다 박사는 하나님 안의 즐거움을 강화하는 통로인 관상기도를 갱신하는 (청교도 역사의) 회복이 오늘날 건전한 복음주의 영성에 훌륭한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데 나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작 앰브로즈에 관한 연구서인 이 책을 열정적으로 추천한다.”

풀러신학교 총장인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훌륭한 책에서 탐 쉬안다는 최근에 우리가 후회할 정도로 비밀로 하고 있었던 사실-청교도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 더 나아가서 심오한 칼뱅주의자가 되는 것 즉 신비주의에 대한 가르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유명한 청교도인들인 리차드 십스(Richard Sibbs), 프란시스 루스(Francis Rous), 토머스 굳윈(Thomas Goodwin),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오웬(John Owen), 카튼 매더(Cotton Mather)같은 대표적인 청교도인들도 ‘관상적 신비적 경건’을 즐겼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나선 에드워즈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을 즐기는 기쁨 체험을 강조했고, 신칼뱅주의(New Calvinism) 운동을 주도하는 존 파이퍼, 팀 켈리, 샘 스톰즈 등이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청교도들의 관상기도를 회복을 주창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이나 미국의 보수 장로교나 개혁주의는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산물인 프란스시 튜레틴의 『논증 신학』을 바탕으로 한 미국 프린스턴 신학의 전통을 이어 받아 전자의 칼뱅주의에 치중하여, 체험 보다는 교리, 신비 보다는 이성을 중시하여 신앙의 본질인 신비 체험을 무시한 결과 ‘죽은 정통’의 늪으로 빠진 것으로 진단한다.

종교에서 신비를 제거하면 교리의 뼈만 남지 않는가? 그런데 이성주의의 늪에 빠진 전통주의자들은 성경 진리를 논리적, 교리적으로 바르게 서술만 하면 삶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처럼 착각해 온 것이다.

신자의 삶은 교리의 테두리 내에서, 성령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부단히 죄와 싸우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체험과 능력을 경험하고 주님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이지 바른 교리에 대한 고백과 이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몰락해 가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비움'과 '내려놓음'을 통해 '무집착'과 '내적 평안'을 누린 사막 교부들

한편, 수도원의 영성과는 달리 사막 교부들은 금욕훈련을 통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에 매진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 체험을 동력으로 힘든 고행을 하면서 세상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성화(神聖化, deification)를 추구했다. 그 결과 보이는 것에 대한 무집착(아파테이아. detachment)과 내적 평안(헤시키아. Inner peace)을 누렸다.

요즈음 불교나 천주교에서 하는 명상훈련이나 마음공부가 곧 기독교의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나 사막 교부들이 추구한 ‘하나 되는 체험’-합일체험-과 ‘비우는 훈련’이다.

교회사를 볼 때 불교가 수도원이나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비록 타락하고 참 하나님을 몰라도 본성적으로 절대자나 신과 하나됨을 추구하고 자신의 참 자아-타락 후에도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를 찾아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 하나님을 모르고 성령의 도움 없이 인위적 노력으로 추구하지만 참 하나님을 만난 것과 비슷한 황홀 체험, 자신을 비워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난 어떤 경지에 오르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독교가 마음훈련을 제대로 하면 불교, 단월드, 마음수련 등에 빼앗긴 사람들을 되찾아 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필자가 경험하고 연구한 바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체험, 회개를 통해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그들이 수행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나 평안 보다 훨씬 더 차원 높고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그들처럼 악한 영에 사로잡히는 후유증도 없기 때문이다.

 

-영성에 대한 전통 신학의 비판과 오해

전통적 개혁신학은 수도원의 수도사나 사막 교부에 대해 비판적이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수도원에 갇혀 행동이 없는 몰현세적인 삶을 살았고, 사막 교부들은 인위적 금욕주의와 고행으로 도를 닦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영적 결혼’은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 되는 것’, ‘신성화’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추구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그들에게 이런 신학적 약점은 있다. 사막 교부들이 활동하던 A. D. 3~4세기나 중세의 수도사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교리적으로는 암흑기였고 오늘날처럼 주요한 신학이 정립된 시기가 아니었다. 만일 오늘날의 신학 잣대로 판단하면 초대 교회 시대의 교부들이나 심지어는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인 어거스틴조차 이단으로 정죄 받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체험했고, 무엇을 추구했는가’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통 신학은 약점이 없는가? 사도 시대 이후에 방언· 신유·축사·예언이 중지되었다는 기적중지론과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2대 신학적 오류만 해도 치명적 약점이다. 다만 한국 교계에서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정통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수도원의 영성은 신자가 성령 안에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으로 하나 되는 기쁨 체험을 누리는 것이다. 이때 신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황홀체험을 누린다.

이런 체험이 없는 자들은 이런 것들을 불건전한 신비체험으로 격하하지만 이런 체험을 자주 하면 보이는 세상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쉽게 내려놓는다. 이런 천국의 체험이 주는 기쁨과 가치에 비하면 세상 것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배설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빌 3:8-9).

필자는 이러한 강렬한 체험을 7일 동안 누린 적도 있고 마음훈련을 통해 오래 동안 마음을 비운 결과 어떤 때는 6개월 이상 누린 적도 있다. 사실 이런 체험을 어느 정도 하면 보이는 세상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대부분 사라진다.

또한, 천국은 문짝 하나가 진주이고 바닥은 투명한 금이고 장식품은 각종 보석들이다. 그런데 지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아파트나 건물이라도 철근, 콘크리트, 대리석이나 나무 등으로 지은 것들이다. 천국의 화려함이나 부요함과 비교할 깜도 되지 않는다. 그만큼 천국과 지상의 것들은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다만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의 건강과 재정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불교와 천주교 및 타종교가 그나마 신(神)이나 자연과 하나되는 체험과 비우는 훈련을 통해 세상 것에 대해 초연하고, 그 결과 윤리도덕적인 죄를 덜 지으니까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존경 받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 지도자들이나 신자들은 여전히 세상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매여 윤리도덕적 죄를 지으면서까지 세상 것들-돈, 이성, 명예-을 무리하게 추구하니까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탐욕스럽고 저질스러운 집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말씀사역·은사사역·생명사역의 조화

 

개신교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말씀사역과 은사사역에 더하여 마음사역 또는 마음훈련-회개훈련, 내면훈련-을 통한 생명사역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희망이요 미래다. 필자가 수년에 걸쳐 은사사역을 변호해 온 것은 생명사역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를 확실하게 해놓자는 것이었다. 신자는 말씀사역과 은사사역에 이어 생명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

필자가 말하는 생명사역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누리는 기쁨과 황홀 체험,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무집착과 평안을 누리는 마음훈련-경건의 연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훈련은 자기 영광과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겉사람을 깨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훈련이다.

성경을 보면 은사사역(사도행전)-말씀사역(서신서의 “하나님에 대한 서술 부분”[Divine indicative])-생명사역(서신서의 “사람에 대한 명령부분” [Human imperative])의 순서로 이어지지만 한국 교회나 세계 교회는 종교개혁의 말씀사역-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의 은사사역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 개신교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 등의 개신교가 이런 생명사역을 제대로 하는 심층종교(알맹이 종교)에 매진하면 재도약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껍데기만 남은 표층종교(껍데기 종교)-메마른 교리, 형식적 예배 행위, 치병구복의 기복신앙 등-가 되어 주변의 컬트로 전락할 가능성도 농후하다고 본다.

 

-원론도 중요하지만 각론이 더 중요

그런데 원론(原論)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각론(各論)이다. 누구나 교회의 문제 제기를 하고 해답을 제공한다. 한국 교회가 재기하기 위해서는 영성, 거룩, 윤리도덕성을 회복하면 된다. 말을 들어보면 수긍이 가는데 구체적 ‘하우 투’(How to)가 없다. 원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도 각론을 모르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필자는 오래 동안 각론을 찾아왔다. 필자는 20년 동안 비운 후에 채우는 마음훈련을 하면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각론을 찾아왔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비우는 것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나님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알게 해주셨다.

세상 사람들이 불교의 성철 승려나 천주교의 김수환 신부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큰 업적을 이루고 초자연적 능력을 많이 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적 노력이지만 부단한 수행을 통해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보이는 세상 것들에 초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수많은 유명 개신교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아직도 많은 지도자들이 보이는 세상 것들-돈, 이성, 명예, 권력-에 집착하여 추한 꼴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 성공한 중대형 교회 목회자를 보면 상당수가 자랄 때 가난에 찌들어서 못 먹었고 못 산 사람들이 많다. 필자도 그런 세대 중의 한 사람이다. 너무나 못 먹고 못 살아서인지 온갖 윤리도덕적 스캔들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현재 자기들이 ‘받아서 누리는 축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천민 자본주의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절대 가난’의 시대에는 성공 자체가 ‘축복의 상징’이었지만 소득 2만 달러를 넘어 3만 달러를 달성한 선진국 한국에서 성공만을 추구하는 교회는 이제 ‘탐욕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물론 필자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필자는 20여 년 동안 이런 죄악을 뿌리뽑으려고 노력한 결과 수도원의 영성(합일체험에 의한 기쁨과 황홀체험), 사막 교부의 영성(무집착과 평안)을 누리면서 자기 영광, 세상 영광을 이겨왔으며 이제 이런 운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확장해 가려고 한다.

 

나가는 말

 

사람의 몸도 성장기에는 잘 먹어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배출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못 먹어서 걸리는 병 보다 너무 잘 먹어서 걸리는 생활습관병-당뇨, 비만증, 심장병, 고혈압 등-이 더 많다. 너무 잘 먹고 운동이 부족하면 혈전(피떡)이 생기고 동맥경화증에 걸려 고통을 받는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는 지금 영적 비만증에 걸려 있다. 좋다는 프로그램 다 해보고, 세계적 유명 인사의 맛있는 말씀은 모두 먹어 보고 기름부음도 받아 보았지만 더 이상 감동도 별로 없고 사람이 변한 것도 아니다.

지금 한국 교계의 위기는 신학이 부족하고 말씀이 부족하고 은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너무 많이 먹고 채우지만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제대로 비우지 못한 것이 문제다. 영적 비만, 영적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해답은 영적으로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다. 영적으로 비울 때 내면이 변하여 자연스럽게 자기 영광, 세상 영광을 내려놓고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돈, 이성, 권력 및 명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한국과 세계의 개신교가 교회가 이런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주신 기회의 때다. 위기는 항상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제대로 비우면 한국 교회는 재도약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재도약한다는 말은 신자 한 명 한 명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기쁨 체험, 거룩을 통한 도덕성의 회복, 보이는 것에 대한 무집착과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영성가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신자가 될 때 개신교의 위상은 올라가고 전도도 잘 될 것이다.

필자는 마음훈련에 의한 생명사역을 통해 개신교계에 성철이나 김수환을 능가하거나 버금 가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자가 성철이나 김수환처럼 ‘가난뱅이’로 살아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거룩한 자에게 물질축복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마음훈련을 제대로 하면 물질축복도 주신다. 그러나 자기 소유가 아니라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신다. 마음훈련과 물질축복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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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

[1]  최윤식,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생명의말씀사, 2013, p. 39

[2] “1위 종교 자리 내 준 불교, 호감도는 여전히 압도적 왜?” 『불교신문』, 2018년1월6일.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024

[3] 이원규, “한국교회 위기와 목회자의 윤리적 책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2017년7월20일; http://www.kpastor.org/news/articleView.html?idxno=1964

[4] Ibid.

[5] 최윤식,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p. 13.

[6] 황인호, “목회자들의 도덕적 실패가 한국교회 위기를 불렀다,” 『국민일보』, 2018년7월17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530559

[7] 이원규, “한국교회 위기와 목회자의 윤리적 책임.”

[8] 유영대, “크리스천이지만 교회 출석 않는 가나안 신자 190만 명,” 『국민일보』, 2017년12월16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66930

[9] 일반적으로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은 사역을 위한 ‘(기적행하는) 은사’라는 말과 대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나 변화를 지칭하며, 이런 것을 추구하는 훈련을 영성훈련, 이런 훈련을 추구하는 사람을 영성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에서는 영성, 영성사역, 영성가라는 용어 사용에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전택설(타락 전 선택)과 후택설(타락 후 선택설), 사람의 원죄가 어떻게 전가되는 가에 따른 대표론과 실재론 등이라는 전문 단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단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단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성시 하려는 것은 지적 오만이자 편협에 불과하다. 

[10] Howard Rice, Reformed Spirituality, Louisville, 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pp. 24-26 ; 하워드 L. 라이스 저, 『개혁주의 영성』,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11] Tom Schwanda, Soul Recreation: The Contemplative-Mystical Piety of Puritanism, Pickwick Publications, 2015, Kindle ebook. *

 

구요한 목사 lifech06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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